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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두 여인

메디치 가문의 두 여인

 

글 최훈 본지 발행인 사진 Pixabay, 위키피디아







15세기 중엽 이탈리아 반도의 중서부 피렌체(Firence, 영 Florence)에 인류 역사상에 오래 기억될 한 걸출한 가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메디치가(Medici Family)이다. 우리들이 이 가문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는 몇 가지 사안이 있다.

 

하나는 인류문명사에 한 획을 그은 중세 르네상스를 일으켰다는 역사적 의미, 다른 하나는 당시 유럽 여러 나라 가운데 가장 앞선 선진문물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오늘날 이탈리아 와인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끼안띠 와인을 실질적으로 보호, 계승 시키는데 이바지 했다는 사실 등이다. 이번 이야기는 이 가문의 두 여인이 프랑스 왕가에 시집오므로해서 전해진 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 가문의 시작

 

메디치 가문의 시작은 1230년으로 기록된다. 피렌체의 북쪽에 자리한 농촌마을 무젤로(Mugello)에서 이 집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어 그러하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역사는 가문의 흥기와 번성을 가져다 준 은행업을 시작한 1397년을 이 가문의 실질적인 역사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집안의 절문은 1743년, 안나 마리아 루이사(Anna Maria Lusia, 1667~1743) 때이다. 더 이상 가문을 이을 후사가 없어 그녀가 죽게 되면서 500여 년간 이어온 메디치 가문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는것이다.

 



○ 가문의 융성

 

메디치가의 번성은 14세기 후반(1397년) 지오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i dé Medici, 1360~1429)가 은행업과 환전업을 하면서 부를 축적해 그의 자손들이 화려한 명가의 계보를 잇게 한데서 연유하고 있다. 아버지의 부를 활용, 가문을 한결 단단하게 기반을 다듬은 사람은 바로 코지모 데 메디치(Cosimo dé Medici, 1389~1464)이다. 어느 면에서는 이 가문의 중흥시조이기도 하다. 훗날 그를 가리켜 ‘조국의 아버지’라 일컫는다. 

 

다음은 이 가문의 위대한 로렌쪼 데 메디치(Lorenzo dé Medici, 1449~1492)의 출현이다. 코지모 1세의 손자로 태어나면서 이 가문에 화려한 영광이 깃들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20세에 병약한 아버지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죽자 1469년 20살 약관의 몸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문을 잇는다. 그는 금융업으로 얻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교황과의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교황청과는 긴밀한 사업 거래를 유지했다. 한편 축제, 무도회, 마상 창 시합 등 피렌체 시민들이 함께 환호하고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행사를 마련해 시민들에게 이 도시의 영광을 만끽하게 하고 스스로 실질적인 군주의 권좌를 누렸다. 이웃나라의 군왕과 왕후 제상들이 이곳에 들르게 되면 으레 메디치가에 유숙했고 그곳에서 베푼 만찬을 즐겼다.

 

우리들이 로렌쪼에 대해 특히 유의하는 점은 그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다. 이 열정이 곧 인류 역사상에 찬연한 빛을 남긴 르네상스를 일궈내게 된다. 만약 피렌체에 로렌쪼가 없었다면 르네상스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미켈란젤로, 단테,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갈릴레오, 보카치오, 라파엘 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로렌쪼의 후원을 입고서 르네상스의 물결을 일으켰다. 훗날 로렌쪼를 가리켜 ‘위대한 로렌쪼’(Lorenzo il Magnifico)라 일컫는 것도 이에서 연유하고 있다.




 



○ 가문의 시련

 

1484년 로렌쪼와 사이가 극히 나빴던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죽고 인노첸조 8세가 들어서면서 두 사람 간에는 새로이 돈독한 관계가 이어졌다. 로렌쪼는 새 교황의 조카인 프란체스코 치보를 그의 사위로 삼으면서 교황청에 대한 메디치가의 영향력을 또 한 번 누렸다. 사실, 로렌쪼는 이전의 식스투스 4세에 대해 한 맺힌 사연이 있었다. 피렌체에서 은행업을 하던 경쟁 관계의 파치 가문이 로렌쪼에 맞서 교황청의 재무 업무를 가로챈 일이 있었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파치 가문의 후원자로 뒷배를 봐주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메디치 가와 파치가, 그리고 교황 간에는 보이지 않는 알력이 드리워져 있었다. 끝내 파치 가문이 로렌쪼에 대한 암살 음모를 실행에 옮겼으나 실패로 끝나 로렌쪼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와중에서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é Medici)가 피살된다. 

 

달리 피렌체에는 새로운 정치적 도전이 있었다. 로렌쪼의 말기, 수도승 사보나롤라(Savonarola, 1452~1498)가 나타나 오직 그로스도만이 피렌체를 다스릴 수 있다는 그의 신정정치(神政政治)를 내세워 피렌체의 시민을 선동, 현혹시켜 메디치가를 배척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가문의 주업이던 은행업이 잘못된 대출과 펀드 운용으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하기는 했다. 1492년 늦은 밤 로렌쪼는 43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 가문의 번성과 몰락

 

가문의 번성은 대단했다. 피렌체의 실질적인 영주로서 정치, 경제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을 뿐 아니라 문화, 예술, 건축 면에서도 엄청난 이바지를 했다. 또한 숱한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을 후원해 주었다. 오랜 세월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인물도 대단했다. 4명의 교황을 비롯해 두 명의 프랑스 왕비 그리고 이들 자손이 유럽의 여러 왕가들과 얽혀 유럽 내에서 가장 융성한 가문의 하나가 되었다. 구체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쥔 4명의 교황에는 레오 10세(Pope Leo Ⅹ, 1513~1521), 클레망 7세(Pope Clement Ⅶ, 1523~1534), 피우스 4세(Pope Pius Ⅳ, 1559~1565), 그리고 레오 11세(Pope Leo Ⅺ, 1605~1605)등이 있었다.

 

또한 2명의 프랑스 왕비에는 카테리나 드 메디치(Caterina dé Medici, 1519~1589)와 마리 드 메디치(Marie dé Medici, 1575~1642)이다. 이들은 각기 프랑스 발로아 왕조의 앙리 2세 그리고 부르봉 왕조의 앙리 4세와 혼인했다. 1569년 메디치의 코지모 1세가 시에나를 정복, 영토를 넓혀 이전의 피렌체 공화국에서 토스카나 대공국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코지모 3세(Cosimo Ⅲ, 1640~1723)에 이르러 가업이던 은행업이 파산되면서 끝내 가문이 절문에 다가섰다. 최종적으로 1743년 안나 마리아 루이사에 이르러 후사가 없어 폐문하기에 이른다. 

 



○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na dé Medici, 프랑스 Catherine dé Medici, 1519~1589)

 

16세기 초 로렌쪼의 아들 로렌쪼 2세가 아버지 뒤를 잇고 그의 딸 카테리나가 태어나면서 그녀한테 프랑스 왕비의 연이 닿게 된다. 당시 교황이던 클레망 7세(Pope Clement Ⅶ, 1523~1534)가 메디치가 출신이어서 그 자신이 프랑스 앙리 2세 왕자와 중매에 나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533년, 그녀의 나이 14살 때 프랑스 발로아 왕가의 앙리 2세와 결혼하게 된다. 바로 프랑수아 1세의 둘째 아들이다. 발로아 왕가의 앙리가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여자를 데려오는데 대해 프랑스의 귀족들이 상당한 반발을 보였다. 이런 반발에 대해 앙리의 아버지 프랑수아 1세는 상당히 곤혹스럽게 여겨 앙리 2세는 결과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며 메디치가의 카테리나 역시 왕비가 될 수 없을 것임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 혼사는 사실상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누구보다 흠모했고 프랑스 루아르 지방에 르네상스를 실현코자 했던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작품으로도 여겨진다. 사실 국왕은 파리의 퐁테블뢰 궁전을 위시해 샤또 드 샹보르 등을 건축하면서 숱한 이탈리아의 장인과 예술가들을 프랑스로 불러들였으며 특히 왕이 롬바르디 공국을 침공했을 때 레오나르드 다 빈치를 만나 그를 프랑스로 초청한 바 있었다. 다빈치는 훗날 루아르에 들어와 국왕이 마련해 준 샤또 뤼세에서 여생을 마치기도 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프랑수아 1세는 그의 둘째 아들 앙리 2세와 메디치가의 카테리나와의 혼사에 보다 적극적 이었을 것임을 짐작케 해준다. 

 

우연스레 1536년 앙리 2세한테 왕관이 씌워지는 계기가 있게 된다. 프랑수아 1세의 적자이면서 그의 후계자로서 다음 왕권을 이어받을 형 프랑수아가 감기에 걸려 끝내 열병에 걸려 죽고 말게 된다. 이로 인해 다음 왕권은 자연스레 앙리 2세한테 넘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메디치가의 여인에 대해서 발로아 왕가는 차가웠다. 그나마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생존했을 때는 약간의 버팀목이 되기도 했으나 그가 죽은 후 더 한층 간고(艱苦)의 왕실생활을 헤쳐나가야 했다. 한때는 이혼 설마저 돌기도 했다. 다행이 왕가의 적통을 이어줄 아들 프랑수아 2세를 출산하면서 더 이상 버림받는 이야기는 없게 되었다. 1547년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죽은 후 카테리나는 정식으로 프랑스 국왕의 왕비자리에 오르게 되고 2년 뒤 생 데니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갖는다. 역사상 이탈리아 여성이 프랑스 발로아 왕가의 일원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 앞에 또 다른 굴욕과 시련이 가로막고 있었다. 국왕 앙리 2세는 카테리나한테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오직 정부인 ‘디안느 드 푸아티에’(Diane de Poitier)한테 푹 빠져 있었다. 그녀는 앙리 2세보다 19살 연상의 후작 부인이기도 했다. 또한 위세가 대단했다.

 

어려움 속에서도 카테리나는 발로아 왕가의 전통을 지키는데 헌신했다. 이런 노력으로 그녀는 달리 보상을 받게 된다. 남편 앙리 2세가 죽자 아들 프랑수아 2세(1556~1560)가 15살 나이에 왕권을 이어받았으나 불과 1년 만에 죽데 되고 다음 왕권은 샤를르 9세(1560-1574)한테 넘어갔다. 이때 그의 나이 5살. 이 과정에서 카테리나는 탁월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해 곧바로 ‘프랑스 통치자’(Govenor of France)의 자리를 꿰차면서 나름대로 프랑스 국정을 다스렸다.

 

맨 처음 위세를 보이던 전 남편의 정부한테서 보석 등을 몰수하고 남편이 그녀한테 주었던 샤또 쉬농소를 되찾았다.





 

새로운 시련이 카테리나한테 닥쳤다. 아들 샤를르 9세가 23살의 나이로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세 번째 아들 앙리 3세(1574~1589)가 다시 발로아 가문의 적통을 이어 국왕이 된다. 그러나 그의 과격한 성격 탓으로 끝내 당시 왕권에 버금가는 권력과 위세를 지닌 기즈 공작(Duke of Guise)을 궁으로 불러들여 척살하므로서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인다. 다행히 부르봉 가문의 나바론 국왕 앙리 3세를 그의 후계자로 지목하게 되면서 발로와 왕가는 막을 내리고 새로이 부르봉 왕가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한 마디로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집 온 카테리나 데 메디치는 남편 앙리 2세를 비롯해 세 아들이 국왕의 자리를 차지하므로 30여 년간 정치적 득세를 누리면서 발로아 가문을 지켜냈다. 이른바 ‘메디치가의 카테리나 시대’를 연 것이다.

 



○ 마리아 데 메디치(Maria dé Medici, 프랑스 Marie dé Medici, 1575~1642)

 

프랑스 발로아 왕가의 앙리 2세와 결혼한 카테리나 데 메디치에 이어서 두 번째로 프랑스 왕가에 시집가 왕비의 자리에 앉은 여성이 바로 마리아 데 메디치이다. 마리아는 메디치 가문의 한 분파인 토스카나 대공(Grand Duke of Tuscany)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거칠고 탐욕이 센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마리아가 프랑스 왕가의 비가 된 배경에는 집안의 부와 무관치 않다. 당시 부르봉 왕가는 메디치가에 꽤 많은 부채를 지고 있었기에 앙리 4세가 재혼의 상대로 대공의 딸을 맞이하게 되면 그녀의 엄청 많은 지참금이 있어 이전의 부채 탕감에 아주 유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앙리는 유럽 내에서는 제일가는 상속녀로 알려져 있었다.

 

1600년 마리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앙리 4세와 혼인을 갖는다. 이즈음 앙리는 발로아 가문의 마르가레트와 이혼한 있는 상태였다. 마리아가 결혼 후 10년째 되는 해에 그녀는 왕비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남편 앙리 4세는 구교도의 광신자한테 파리 거리에서 암살당하게 된다. 이에 마리아는 아직 미성년인 그의 아들 루이 13세를 대신해 왕권의 섭정을 갖는다.

 

마리아는 천성적으로 욕심, 특히 권력의 집착이 아주 심했다. 원래는 그녀의 아들 루이 13세에 대한 섭정기간이 1614이었으나 쿠데타를 통해 1617년까지 지속했다. 이런 사정으로 해서 그녀는 아들 루이 13세 국왕과 사이가 아주 나빴다. 특히 그녀가 총애하던 이탈리아인 콘치노 콘치니(Concino Concini)의 방종과 오만에 대해 국왕은 그를 아주 싫어해 끝내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어머니와의 불화는 때로는 화해를 통해 봉합되기는 했으나 여러 차례 되풀이하게 되므로 궁극에 가서는 엄마를 국외로 내쫓아 버렸고 그녀의 마지막 생은 국외에서 유랑자처럼 지내기도 했다. 

 

초기 마리아와 루이 13세간의 불화를 봉합하는데 이바지한 역사적 인물에 추기경 리슈리외가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를 아들의 총신으로 여겨 배척했으나 국왕은 언제나 리슈리외를 총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리아는 앙리 4세와의 사이에 아들 국왕 루이 13세를 비롯해 모두 여섯 자녀를 두었다. 이들 가운데 두 딸은 유럽 국왕의 왕비가 되었다. 즉 스페인 국왕 필립 4세와 그리고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비인것이다. 

 

마리아는 독일의 쾰른에서 마지막 유랑을 멈추고 그녀의 파트롱이었던 화란의 피터 폴 루벤스가 빌린 집에서 거처를 정하고 머물다 1642년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생 데니 대성당에 묻혔다. 뒤따라 아들 루이 13세 국왕과 그의 총신 리슈리외는 서로가 한 해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해 다함께 죽었다. 

 







○ 두 여인의 문물

 

메디치가의 두 여인, 즉 카테리나와 마리아가 프랑스 왕가로 시집와 왕비가 되고 두 여성 다 남편이 죽은 후 섭정을 맡으면서 파란 많은 정치사적 흔적을 보이고 있다. 이런 사안과 달리 두 여인은 당시 피렌체보다 문물이 한결 뒤떨어진 프랑스 왕가에 끼친 영향은 매우 대단한 것으로 여겨진다. 두 여인 모두가 고향 이탈리아의 장인들을 프랑스로 불러들여 예술, 회화, 조각, 수집품등에 지대한 이바지를 한 것으로 되어있다. 또한 식탁문화로 함께 들여와 한결 변모된 프랑스 왕가의 식탁문화를 다듬은 것으로 되어있다.

 

카레티라 데 메디치는 그녀의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가 일찍부터 이탈리아의 문물, 특히 메디치가의 르네상스를 흠모했기에 며느리인 카테리나도 그의 바람을 충족시키는데 여러모로 이바지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거의 30여 년간에 걸친 예술 지원 프로그램이었으며 이를 통해 그녀는 후기 프랑스의 르네상스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간여했다. 또한 그녀는 건축물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이기도 했다. 앙리 2세가 죽은 후 남편에 대한 불멸의 애정과 발로아 가문의 영광을 위해 여러 건축물을 남겼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샤또 드 몽소, 샤또 드 생모르 그리고 쉬농소 등이 바로 이들이다. 또한 파리에 튈리에 궁과 오텔 드 라 렌 궁(Hôtel de la Reine)을 짓기도 했다. 후자는 지금 ‘Hôtel de Soisson’(오텔 드 스와송)으로 바뀌어 있다. 오늘날 파리를 찾는 수많은 외국관광객이 반드시 찾는 관광명소이다.

 

달리 후진적인 프랑스 왕가의 식탁문화 향상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54년 발간된 Diderot와 d’Alembert의 백과사전 도입 부문에서 프랑스 상류음식과 소스의 실체가 카테리나의 영향임을 밝히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 사후 그녀의 수준 높은 수집품에 대한 안목이다. 타페스트리를 위시해 수작업으로 만들어진 지도, 조각품, 장식품, 상아 제품, 중국 도자기 등, 그리고 파리 외곽에 있는 퐁텐블로에 남아 있는 안토니 카롱(Antonie Caron, 1521~1599)의 작품 등이 그녀의 열정이 담긴 유작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음식 문화의 전래, 향수의 소개, 마카롱 과자, 승마법, 코르셋 착용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마리아 데 메디치 역시 프랑스의 예술, 문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파리의 룩셈부르크 궁정의 건설이다. 이 궁을 통해 파리 시민의 예술적 안목을 드높여 줄 수 있다고 여겼다. 궁의 부지를 매입하고 1615년부터 건설에 착수 했다. 당초에는 메디치 궁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궁정의 뮤즈 그림을 위해 이탈리아 조반니 발리오네(Giovanni Baglione)가 초정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치세와 화려한 인생역정을 21편의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 네델란드의 화가 Peter Paul Rubens(1577~1640)를 초치해 제작시킨 작품은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참고로 루벤스는 마리아 왕비가 말년에 아들, 그리고 아들의 총신 리슈리외와의 알력으로 해외 유랑을 할 때 독일의 쾰른에 그의 자금으로 거처를 마련해 준 작가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마리아 데 메디치는 당시 유럽 굴지의 자산가이던 토스카나 대공의 딸로서 빚에 허덕이던 프랑스 앙리 4세와 결혼해 왕비로서, 그리고 왕의 어머니로서 파란 많은 인생을 보내면서 파리 한 복판에 룩셈부르크 궁을 남겨놓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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