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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조제핀, 그리고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


여태까지 역사적인 만남의 코너에서는 두 사람 간의 진한 역사적 사실을 만남의 이야기로 적어왔다. 이번호에서는 세 사람 사이에 맺어진 기연을 전제로 이 코너를 메웠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1세, 그의 배우자였던 조제핀 황비, 그리고 러시아 제국의 차르(황제) 알렉산드르와의 만남이다.


조제핀, 나폴레옹과의 해후

조제핀은 서인도제도의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의 부유한 귀족 출신이며 해병대의 장교였던 아버지 마리 조제프 따쉐 드 라 파제리의 세 자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보아르네 자작의 아들 알렉산드와 조제핀의 동생이 결혼했으나 신부가 일찍 죽자 조제핀 자신이 그의 새 신부로 들어간다. 당시 아버지의 사탕수수밭이 허리케인으로 쑥대밭이 되어 가세가 몹시 어려웠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자 그녀의 남편은 당시 전횡을 휘두르던 자코뱅당의 미움을 받아 투옥되고 끝내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조제핀 자신도 투옥되었으나 로베스 피에르가 처형되고 자코뱅당이 몰락하게 되자 그녀는 처형을 면하고 감옥에서 방면되었다.


이후 조제핀은 파리 사교계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상속받은 죽은 남편의 재력을 깔고 타고난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면서 오래지 않아 사교계의 꽃이 된다. 그녀 주변에는 숱한 정치인들이 맴돌았고 그들과 거리낌 없이 염문을 날렸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당시 총재부의 실력자인 바라스였다. 1795년, 바라스의 주선으로 조제핀은 처음으로 여섯 살 연하의 볼품없는 나폴레옹과 만났다. 수줍은 나폴레옹은 그녀의 늘씬한 자태에 혼을 잃고 이내 그녀에게 청혼한다. 그리고 이듬해 3월 결혼했다. 훗날 유럽을 흔들어 놓을 위대한 야심가의 품에 안긴 셈이다. 어머니를 비롯해 가족들은 이 결혼을 반대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두 자녀가 있고 사교계에서 내놓으라 하는 인사들과 무수한 염문을 퍼뜨린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종신 집정을 거친 후 황제의 위에 오르는 대관식을 가졌다. 대관식의 집전은 교황 피우스 7세. 조제핀은 나폴레옹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두 사람 간의 애정은 이미 서로의 불신 속에서 명맥을 이을 정도였다. 1810년 그녀는 황제의 자리를 이을 상속인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사유로 이혼당했다. 다만, 나폴레옹의 배려로 황후의 칭호는 그대로 유지했다. 새로 장만한 샤또 말메종으로 거처를 옮기고 그녀는 이곳에서 장미를 가꾸고 흘러간 명사들과 한가로이 와인 잔을 나누며 여생을 보냈다. 허나 나폴레옹은 생전에 다시 조제핀을 찾지 않았다.

 

나폴레옹의 몰락이 다가섰다. 결정적인 계기는 러시아가 나폴레옹이 짜놓은 프레임의 대륙봉쇄를 파기하자 이를 응징하고자 1812년 러시아 침공을 감행한 데서 비롯된다. 이듬해 다시 유럽 원정에 나섰다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크게 패배를 당해 끝내 엘바섬으로 유배된다. 나폴레옹이 이 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 조제핀이 죽음을 맞는다.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은 이틀 동안 문을 잠그고 아무와도 얼굴을 맞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1815년 워털루 전쟁에서 패해 세인트 헬레나 고도로 유배되었다가 1821년 운명하게 된다. 이때 중얼거린 낱말 하나가 ‘조제핀’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 천적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와의 만남

1812년 6월, 마침내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을 결단했다. 차르의 무례와 오만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대 러시아 선전 포고와 더불어 45만의 군대를 발동했다. 나폴레옹 스스로 전군을 지휘하는 가운데 네 원수를 비롯한 역전의 장군들을 총동원해 역할을 분담했다. 아직은 6월 초여름이어서 막강의 프랑스 대 육군(Grande Armée)은 별다른 저항 없이 니에멘 강을 건너 곧장 스몰렌스크(Smolensk)를 장악했다. 이어 진군을 거듭해 200마일 떨어진 러시아의 심장부 모스크바로 진격했다. 9월 14일, 나폴레옹 군은 드디어 모스크바에 입성했다. 그리고 황제 자신은 차르 알렉산드르가 강화조약을 요청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러시아의 반응은 싸늘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수도 모스크바가 유령의 도시처럼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다. 인적이 없는 거리에 햇살만 쏟아지고 있었는데 해가 진 뒤에는 예상치 못한 선물이 점령군에게 선사됐다. 어둠과 함께 몰아치는 거센 바람에 온 도시가 불길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른바 공성작전(空城作戰)에 화공전략(火攻戰略)이었다. 러시아 황제에게 강화를 요청하러 간 특사는 의외의 대답을 가져왔다. “그가 아니면 나, 내가 아니면 그, 우리 둘 중 하나는 결코 오랜 기간 통치를 지속할 수 없게 돼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호사가들은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드르를 나폴레옹의 천적으로 묘사한다. 알렉산드르 1세는 177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폴 1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23세 때 폴 황제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일단의 장군들과 장교들이 한밤중에 황제를 시해하고 아들 알렉산드르를 황위에 앉혔다. 크렘린궁에서 대관식을 갖고 새로이 러시아의 차르가 된 그였지만 일생동안 아버지의 살해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털어버리지 못한 채 병적으로 남을 의심하는 깊은 상흔을 지니고 살아야 했다. 특히 나폴레옹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남달랐다고 전한다. 때문에 제 국토를 유린한 나폴레옹과는 끝내 강화를 할 수 없었으며 되려 그를 나락으로 밀어 넣는 주역이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은 더이상 모스크바에 머물 수 없음을 알고 병참기지가 있는 민스크로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러시아 군대는 오히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백전노장 쿠트조프가 후퇴하는 나폴레옹 군의 위쪽을 치면서 프랑스 육군은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병들이 타는 말들이 추위에 죽어 나갔으며 며칠째 보급품을 얻지 못한 군사들도 혹한과 허기에 지쳐 하나둘 쓰려졌다. 나폴레옹 전사에 치명적인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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