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와인은 마신 뒤보다 머문 순간을 먼저 기억하게 한다. 음악과 미식이 더해진 한 잔의 와인은 취향을 넘어 하나의 문화가 된다. 김인규 대표가 이끄는 ‘와인 쉬어리’는 와인·음식·음악이 만나는 지점에서, 경험의 밀도를 세심하게 설계한다.
글 심혜미 사진 심혜미 정한나
***

아지트형 와인바, 선택과 집중의 미학으로 음악까지 포함한 기억의 설계
“조용하고 아늑하다.”
와인 쉬어리를 경험한 이들이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이다. 이 곳은 화려한 트렌드를 좇기보다 절제와 집중을 택했다. 매장은 10평 남짓의 소형 공간으로, 리뉴얼 과정에서도 규모를 키우기보다는 와인과 대화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조도를 낮추고 패브릭 소재를 적극 활용해 외부와 단절된 프라이빗한 분위기를 완성했다. 이는 단순한 인테리어 변화가 아니라, 김인규 대표가 6년간 영업하며 쌓아온 단골들의 경험을 해치지 않으려는 선택이기도 하다. 공간은 조용하지만, 그 안에서 흐르는 시간은 밀도 있게 설계돼 있다.

듣는 경험이 완성하는 공간의 기억
와인 쉬어리의 가장 분명한 차별점은 ‘듣는 경험’이다. 음악은 배경이 아닌, 공간을 기억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다. 1970년대 빈티지 스피커와 진공관 앰프, 현대적인 하이파이 시스템을 상황에 따라 병행 운용하며, LP와 CD 각각 약 700여 장, 무손실 음원을 활용해 사운드를 구성한다.
날씨와 계절, 시간대에 따라 재즈, 팝, 가요가 자연스럽게 흐른다. 눈 오는 날에는 재즈로 시작하고, 밤이 깊어질수록 음악의 결도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음악을 좋아하는 단골 중에는 스‘ 피커 앞자리에 앉고 싶다’고 요청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현재 주력 시스템인 LP와 CD를 병행하는 구성은 스피커는 프로악(ProAc) ‘리스폰스 D40’ 모델로, 6.5인치 카본 드라이버 특유의 밀도 있는 중저역과 섬세한 해상도가 강점이다. 턴테이블은 토렌스(Thorens) TD-126 MK3에 SME 톤암을 조합했고, CD 플레이어는 약 30kg에 달하는 고급 기종으로 최초 블루레이를 플레이하는 모델로 CD 재생까지 지원하는 재즈와 현악기의 질감을 섬세하게 살려내는 청음 중심의 세팅이다.

리스트보다 사람을 먼저 보는 와인 추천
이곳에서는 와인 리스트보다 대화가 먼저다. 실제로 손님의 90% 이상이 리스트를 보지 않고 추천을 맡긴다. 김인규 대표는 계절, 음식 선택, 손님의 컨디션과 취향 난이도를 종합해 두, 세 가지 선택지를 제안한다. 단순한 설명이 아니라 병을 직접 보여주며 비교해 설명하는 방식이다.
와인 쉬어리가 특히 중시하는 것은 와인의 ‘흐름’이다. 한 병의 임팩트보다, 앞뒤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경험을 설계한다. 갑작스럽게 강한 스타일로 치닫기보다는, 산도와 바디의 결을 따라 계단처럼 이어지는 구성이 기본이다.
국내에 처음 소개한 피에몬테, 베로나 지역 와인과 소량 수입 리미티드 와인 역시 와인 쉬어리만의 정체성을 만든다. 대중적인 선택보다, 지금 이 공간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한 병을 제안하는 데 집중한다.

돌문어 새우 세비체

뵈르블랑소스와 갑오징어
세심한 라인업과 컨템포러리 미식의 조화
최근 가장 반응이 좋은 라인업은 바롤로 계열이다. 리제르바급 와인이 짧은 기간 내 소진될 만큼, 이곳의 기준은 ‘익숙함’보다 ‘메리트 있는 경험’에 있다. 수입량이 적고 오프라인에서 쉽게 접하기 어려운 와인일수록 반응은 빠르다.
음식은 특정 국적에 얽매이지 않는 컨템포러리 스타일이다. 한식의 요소를 억지로 드러내기보다, 와인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방향을 우선한다. 와인의 산도, 질감, 바디를 고려한 페어링을 전제로 메뉴가 완성된다. 대표 메뉴인 돌문어·새우 세비체, 뵈르블랑 소스와 갑오징어, 해산물 요리들은 재방문을 이끄는 핵심 메뉴로 꼽힌다.

신뢰를 남기는 큐레이션
김인규 대표는 KWC(코리아 와인 챌린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며 쌓은 감각을 큐레이션에 반영한다. 다만 와인의 수상 이력은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갈라 디너, 음악과의 매칭, 소규모 테이스팅 등 수상 와인을 쉬어리만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와인 쉬어리는 유명해지기보다, 가장 신뢰받는 공간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예약 시스템을 통해 고객의 취향과 히스토리를 기록하고, 다음 방문에서는 실패 확률을 최소화한다. “여기서는 실패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 단골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유다. 김인규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친구에게만 추천하고 싶은 곳.”
와인을 중심으로 한 경험의 밀도를 지켜내며, 와인 쉬어리는 오늘도 조용하지만 분명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김인규 오너 소믈리에의 One pick!

알베아르 솔레라 1927
Alvear Pedro Ximénez Solera 1927
생산자 Bodegas Alvear
생산지 Montilla-Moriles, Spain
품종 Pedro Ximenez
수입사 KS 와인
Korea Wine Challenge 2024 포티파이드 부분 트로피를 수상한 와인으로 마호가니 컬러의 진하고 달콤한 셰리는 커피와 대추, 자두, 코코아의 깊은 풍미와 농축된 여운을 지닌다. 알베아르의 플래그십 와인으로 뛰어난 숙성 잠재력을 갖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