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주류 판매대는 변덕스런 소비자의 기호를 고스란히 실시간으로 반영한다. 한때 편의점 맥주 코너를 수제맥주가 빼곡히 차지하던 시절이 있었다. 수입맥주, 국산맥주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벌이던 ‘만원에 네 캔’ 영업전략을 수제맥주 업체들도 따라 한 것이다. 평소 한 잔에 7000원 안팎이던 수제맥주를 캔으로는 가격을 반값 이하로 낮출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저가전략을 위해 품질을 낮출 수밖에 없었던 수제맥주는 결국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했고, 편의점 진출을 위해 외부 투자를 받아 생산시설을 몇배로 늘린 수제맥주 업체들은 지금은 수제맥주 대신 ‘울며 겨자먹기’로 하이볼을 만들어 편의점에 납품하고 있다. 그많던 편의점 수제맥주들이 사라진 자리를 하이볼이 차지한 배경이다. 당연히 수제맥주 업체들의 실적은 급전직하로 떨어졌고, 일부는 파산 직전으로 몰리거나 팔려나갔다.

박순욱 전통주 칼럼니스트 사진 박순욱, 크래프트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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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강원도 속초를 거점으로 생산과 영업을 고수하고 있는 크래프트루트는 보기 드문 알짜 수제맥주 업체 다. 2017년에 설립한 이 회사는 처음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영업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장 큰 매출은 양조장과 같이 운영하는 펍에서 올리고 있다. 캔 제품은 양조장이 있는 속초와 인근 양양 정도 범위 안에 있는 편의점에만 공급하고 있다.

 

캔 제품 가격도 7000원 안팎으로, 양조장 한잔 가격과 거의 같게 책정했다. “가격을 낮추면 전국 편의점에 팔아주겠다”는 편의점 본사들의 구애는 많았지만, “가격을 낮추기 위해 품질을 낮출 수 없다”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품질 양보 안한 현지화 전략 먹혀 지속경영 가능

그 덕분에 크래프트루트는 살아남았다. 덩치 훨씬 큰 수제맥 주들이 ‘전국 편의점 판매’라는 유혹(?)에 빠졌다가, 지금도 그 늪을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반면에 ‘현지화 우선 전략’을 펼친 크래프트루트는 탄실한 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이 회사의 매출 60~70%는 양조장이 있는 속초 한곳에서 나온다.

 

사실, 크래프트루트의 선전은 국내 주류업체 중 드문 경우다. 또, 따라하기가 쉽지 않은 영업전략이다. 어떤 술을 만들더라도, 어디서 술을 만들더라도, 판매가 이뤄지는 곳은 서울, 그리고 인근의 수도권이다. 수도권에서 판매가 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게 어디 술 뿐이겠는가? 그러다 보니, 술을 개발할 때부터 소비자 타깃을 수도권에 두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지역의 탄탄한 양조장 대부분도 매출의 절반 이상, 아니 80% 정도는 수도권에서 걷어들이고 있다.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사는데다, 소비력이 가장 큰 집단이 수도권 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래프트루트는 왜 속초라는 지역에 매달렸을까? 사실, 다른 지역에는 없는 장점을 속초가 갖고 있기는 하다. 전국 최고의 관광상권 중 하나인 설악산을 끼고 있는데다, 서울에서 차로 두시간 거리로 수도권 접근성까지 좋은 것이 속초다. 해서, 속초 지역에서 소비된다고 해서 지역주민들이 다 마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일년에 한두번 크래프트 루트 맥주 마시러 속초에 간다”는 맥주 덕후(매니아)들이 의외로 많다.

 

설악산 입구에 있는 수제맥주 브루펍(양조장을 겸한 맥주펍) 크래프트루트는

설악산의 상징 울산바위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맥주를 즐길 수 있다.

 

국제대회 수상 메달

 

 

속초 곳곳의 지역명 활용한 브랜드 전략

크래프트루트의 현지화 전략은 맥주 이름들에서부터 알 수 있다. 동명항 페일에일, 속초 IPA, 청초호 골든에일, 갯배 필 스너 등등. 속초 곳곳의 지역명을 브랜드로 쓰고 있다. 갯배는 속초 아바이마을과 중앙동을 잇는 나룻배다. 이중 가장 잘 나가는 맥주는 11개 제품 중 속초 IPA로, 전체 매출의 20%를 혼자 책임지고 있다.

 

크래프트루트가 지역의 작은 양조장이라고 수준(맥주 양조기술)을 낮춰 보면 안된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수의 맥주국제대회에서 수상한 이력이 100개가 넘는다. 약간 신맛이 나는 맥주인 ‘여행 그램 베를리너 바이세’ 는 유러피언 비어스타에서 두번이나 금메달을 차지했고, ‘갯배 필스너’와 ‘아바이 바이젠’은 일본 국제맥주 품평회인 인터내셔널 비어컵에서 금상 중의 금상인 ‘카테고리 챔피언’을 수상했다. 조선비즈가 주최하는 대한민국주류대상에서도 수차례 최고상을 받았다.

 

결국 크래프트루트의 현지화 전략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탄탄한 양조기술, 기본을 중시하는 양조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크래프트루트 김정현 대표는 건축가 출신이다. 맥주가 좋아서 집에서 맥주를 담가 먹다가 맥주사업에 뛰어들었다. 그 출발지는 속초가 아닌 서울의 종로구 익선동이다.

 

지금도 있는 영업장 ‘크래푸트 루’(루는 다락이란 뜻으로 실제 로 6~8인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다락이 있다)에서 외부의 수제맥주를 공급받아 팔다가 김 대표 고향인 속초에 아예 양조장을 차렸다. 익선동 매장을 운영한 뒤 꼭 일년만이다. 말하자면, 일년 동안 수제맥주에 대한 소비자 취향같은 시장조사를 하고 나서 본격적으로 수제맥주 생산에 뛰어든 것이다.

 

크래프트 루

 

 

김 대표는 건축을 전공했지만, 양조장을 직접 지은 것은 또 아니었다. 양조장 건물은 30년된 식당을 개조했다. 인수하기 전에는 5년간 빈 채로 방치돼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뷰 맛집’이다. 양조장과 펍(맥주 마시는 상업공간)을 겸한 이곳에서는 설악산, 그것도 울산바위를 바라보며 수제맥주 를 즐길 수 있다. 세상에, 울산바위를 코앞에 두고 맥주를 마시다니, 이런 호사를 부릴 곳은 이 곳밖에 없다.

 

최근에 또다른 명물이 등장했다. 티본 스테이크 메뉴가 생긴 것. 한 달 정도 드라이 에이징(육류 숙성방법 중 하나로 섭씨 1~2도 정도의 내부 온도를 유지하는 저장고에서 4~6주 보관한다) 후 구운 티본 스테이크를 서울보다 반값 이하로 즐길 수 있다. 김정현 대표는 “3~4인용 티본을 10만원대 초반 가격에 누릴 수 있는 곳은 속초에서 여기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객 반응도 좋다고.

 

펍을 겸한 양조장 1층은 맥즙을 만들어 발효, 숙성 단계를 거치는 생산공정 설비가 모여 있다. 맥즙 만들기가 시작이다. 분쇄한 맥아를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브루하우스에 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맥아에서 당분이 추출된다. 당화조에서 추출된 당분은 자비조로 옮겨, 당분을 끓이고 맥주의 향에 결정적 변수가 되는 홉도 투입한다.

 

홉은 고온에서 오래 끓일수록 향이 날아가고 쓴 맛만 남게 된다. 그래서 쓴맛을 내기 위해 사용하는 홉은 자비조에서 맥즙이 끓기 시작할 때부터 바로 넣는다. 홉은 맥즙이 끓고 있는 도중에 넣기도 하고 다 끓고 나서 넣는 경우도 있다.

 

(위) 속초 양조장 펍의 야외공간 (아래) 맥주 발효 시설

 

맥주제조 책임자 남도현 팀장

 

 

김정현대표

 

김정현 대표와 마주앉아 본격적으로 수제맥주 질문을 던졌다.

Q. 갯배 필스너와 아바이 바이젠이 일본 국제대회에서 카테고리 챔피언을 수상한 의의는 어디에 있나?

A. “소규모 맥주 양조장이 만들기 어려운 맥주가 필스너 같은 라거 맥주다. IPA나 페일에일 같은 경우는 사실 덧칠(홉량 조절)이 가능하다. 발효 도중의 단점을 보완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필스너나 바이젠 같은 라거는 ‘날 것 그대로의 느낌’이다. 발효에 필요한 효모의 영향을 많이 받고, 공정 과정에 약간만 잘못되더라도 바로 티가 난다. 이런 리스크가 있음에도 우리가 만든 필스너와 바이젠이 국제대회에서 큰 상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의 양조기술이 ‘월드 클래스’ 급이라는 증명이다.”

 

맥주 재료 아끼지 않지만 밸런스 가장 중요시

Q. 맥주 만들 때 가장 유념하는 것은?

A.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밸런스다. 맥주가 갖고 있는 향, 단맛, 과일맛, 쓴맛들이 밸런스가 맞아야 부담없이 많이 마실 수 있다. 우리는 쓴맛을 강조하는 스타일의 맥주를 선호하지 않는다. 왜냐면 맥주 매니아가 아닌 대중성을 우선시 하기 때문이다. 너무 단 음식이 금방 질리듯, 홉도 쌉싸름한 맛, 과일맛에만 치중하면 금방 물린다. 맥주 재료는 아끼지 않지만, 그래도 밸런스가 우선이다.”

 

Q. 홉은 몇가지를 쓰나?

A. “20종 정도다. 유럽 스타일의 맥주는 모두 독일산 홉을 쓴다. 몰트(맥아)는 수율이 좋은 호주산을 기본으로 쓰고 스페셜 몰트는 독일 것을 쓴다.”

 

Q. 3년 전에 인터뷰 했을 때는 ‘제2 양조장’ 검토 중이라고 했는데.

A. “만약 양조장을 추가로 지었다면 지금 망했을 것이다. 생산량을 키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지속가능한 경영이 우선이다. ‘네 캔에 만원’하는 맥주는 만들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이럴 경우, 매출은 커지겠지만 수익성은 더 악화될 수 있다. 직원들만 바쁠 뿐이다. 외부 투자를 받아, 생산량을 늘리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동을 무조건 늘려야 한다. 맥주가 아닌 하이볼도 만들어야 하고. 실제로 그러고 있는 수제맥주업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백화점에 팝업 형태로 진출하기도 하고, 여러가지로 유통망을 다양화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당분간 생산시설을 늘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시장상황을 너무 앞서가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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